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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8일 금 [자]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25-03-28 조회수33

복음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28ㄱㄷ-34

그때에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28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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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3주간 금요일

(2025. 3. 28 ; 답십리 본당)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더 중요한 것, 덜 중요한 것을 따져서 더 중요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며 시간을 할애하고, 노력을 쏟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사실 별 볼 일 없는 시시한 것을 우선시하면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다. 그런 탓에 일의 경중을 잘 헤아리는 사람은 판단력이 좋고 현명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하느님 말씀에서는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말씀이 따로 있고, 덜 중요하고 사소한 말씀이 따로 있지 않다. 모두가 다 중요한 것이고, 전부 거룩한 것이고, 전부 가치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모두 생명을 주시는 말씀과 계명이기 때문이다.

 

   복음서를 보면 많은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시비를 걸었지만 오늘 복음의 율법 학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자신보다 훌륭하신 분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였다. 유다교의 계명은 613개로, 그중 248개는 명령이고 365개는 금령(禁令)이다. 그렇게 많았던 탓에 율법 학자들 사이에서도 어떤 계명이 첫째가는 계명인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첫째가는 계명은 신명기 64절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어른이 된 남자 유다인이 매일 아침·저녁으로 바치던 쉐마라는 중요한 기도의 시작 문장인데,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얘기이다. 하지만 이 사랑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마음은 지혜가 있는 자리였다. 그렇기에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라는 것은 지혜와 모든 열정을 다해 사랑하라는 것이고, 삶 전체를 걸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예수님은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율법 학자는 둘째가는 계명에 대해 묻지 않았다. 오직 첫째가는 계명만 물었을 뿐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918절을 인용하여 둘째 계명을 가르치셨다. 이때 유다인에게 있어서 이웃은 같은 유다인인 친구들과 동료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포함하고 계신다. 그래서 사마리아인과 이방인, 세리와 죄인, 생활이 문란한 여인과 적을 포함한 모두가 이웃이다. 결국 종교, 지위, 남녀노소 등을 떠나 모든 이가 이웃이고, 그래서 우리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고 용서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하느님 사랑의 척도는 이웃사랑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내가 이웃을 얼마만큼 사랑하고 있느냐는 것은 내가 얼마만큼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느냐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내가 좋을 때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진실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예수님은 오늘 복음을 통해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알려주신다. 또 소극적인 율법 준수를 적극적인 실천으로 바꾸라고 하신다. ‘~ 하지 말라는 율법을 ‘~ 하라는 계명으로 받아들이라고도 한다. 요즈음 묻지마 살인과 성폭력,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 세상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어찌 보면 그런 것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니라, 부주의한 말 한마디, 나만 생각하는 말들, 배려하지 못하는 작은 행동들, 이런 행동들 하나하나가 결국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일이다.

   우리 모두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이 자리에 모여와 있으니 이제는 그 사랑이 진실임을 말과 행동으로, 삶으로 보여야 한다. 행동이 없는 말만 많은 신앙, 자기 생각만 고집하는 이기적인 신앙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이 아니라 고통을, 아픔을 줄 수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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