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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강론

2024년 7월 15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24-07-15 조회수53

복음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341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1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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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강론 (2024.07.15. / []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오늘 독서인 이사야서에서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라는 말씀은 놀랍고 두렵다.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며 속죄하고 화해하는 것이 중요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언자를 통하여 전해지는 이 말씀은 청천벽력과도 같았을 것이다. 또 이사야는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라고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음과 생각을 깨끗이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사실 제물을 바치는 것은 속죄하고 화해한 것을 보여 주는 행동이다. 하지만 그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이고 화해이다.

 

   그런 탓에 복음에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비슷한 의미로 들린다. 이는 다른 누구보다 먼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요구이다. 사람 간의 관계에 얽매여 있고 그 관계 안에서만 자신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참된 자신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그 관계를 무시하고 무조건 벗어나라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하느님 앞에 있는 자신만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이웃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가치와는 달리 우리에게, 예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예수님처럼 살려고 노력하고 고민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과 같다. 우리의 삶을 날카롭게 찌르며 고통을 준다. 때로는 이 고민의 칼 때문에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기도 하고, 의견이 달라 대립하며 갈라서기도 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칼 때문에 우리를 원망하며 우리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무겁고 감당하기 힘들지만 끝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우리의 십자가이다. 그 끝에 더 큰 두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끝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우리의 몫이다. 때로 그 십자가의 무게가 고민의 칼로 다가올 때는 예수님의 삶을 바라보았으면 한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신 길의 끝이 죽음이 아닌 부활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기념하는 보나벤투라 성인을 세라핌적 박사라고 하는 것은 그가 지혜는 하느님을 더 사랑하기 위한 수단이라 말하였고, 이를 자기 생활로 증명했기 때문이다. 또 그는 우리 지능을 밝히는 빛이 우리 마음까지 감동을 시키지 않으면 효과가 없는 빛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많은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도리나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바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만을 위해 공부하게 만들고 살게 한 탓에 최고 학부까지 다니는 학생이 살인을 하고 여학생 얼굴을 합성한 음란물을 배포하는 몰염치한 행동들을 서슴없이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사람에게 학식은 도대체 왜 필요하고 무엇을 위한 것일까? 오늘 독서는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라고 한다. 이를 위해 학식이 필요한 것이다.

 

   예언자를, 의인을, 그리고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받아들이는 것에서 진정한 평화가 시작된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자신을 깨끗이 하라는 말씀처럼,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를 통하여 이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평화를 위한 길이다. 더 고민하고 더 노력해야 하는 쉽지 않은 길이지만, 오늘도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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