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0일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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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24-09-20 조회수158 |
복음 <예수님과 함께 있던 여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1-3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2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3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미사강론 (2024.09.20.금 / [녹]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훌륭한 사람’ 또는 ‘위대한 인물’, 아니면 ‘존경하는 분’이라고 얘기되는 분들이 우리와 다른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눈이 3개라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니고, 손이 하나 더 있어서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또 그들은 이슬만 먹고 산 사람들도 아니고, 우리처럼 매끼 식사를 하면서 매일 화장실을 다니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태어날 때부터 ‘훌륭한 사람’, ‘위대한 인물’, ‘존경받는 사람’이 될 운명을 타고 태어난 사람은 더더욱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우리의 차이점이 있다면 나보다 조금은 더 최선을 다했고, 나보다 조금은 더 시간 활용을 잘 했다는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인 니체(F.W. Nietzsche, 1844~1900)는 식사 시간 전 10분을 이용해서, 제임스 프루드(James A. Froude)가 저술한 12권짜리 역사책《영국사》(1858~1870)를 모두 읽었다고 한다. 또 19세기 미국의 시인 롱펠로우(H.W. Longfellow, 1807~1882)는 커피가 데워지기 전 10분을 활용해서 단테의 《신곡》을 모두 번역했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경제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은 동인도회사의 직원으로 일하면서도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서 수많은 저술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천문학자로 유명한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는 외과 의사였지만, 남다른 부지런함과 실험정신으로 연구함으로써 커다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이처럼 그들은 시간이 없다고, 능력이 없다고 핑계를 대지 않았다. 적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을 이용해서 자신의 능력을 계속 개발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성차별은 지금과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남존여비(男尊女卑)라는 의식이, 남성 중심의 생각들이 여전히 남아서 영향을 주고 있는데, 당시 유다인 사회는 여성을 사람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런 시기에 예수님께서는 죄인, 창녀, 세리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는데, 이는 여인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 가운데 첫 번째로 언급되는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는 갈릴래아 호수 주변의 휴양도시였던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를 의미한다. 그 여인을 오늘 복음에서는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여인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일곱은 완전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그런 탓에 정말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여인이라는 것은 아니고 ‘강력한 악의 세력’에 빠졌던 여인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그렇지만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여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 뒤로는 일편단심 예수님만 섬기며 살았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를 때처럼 여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하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하지만 여인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과 함께 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나는 여자니까 못해’라는 핑계를 대지 않았다. 또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제자 되는 것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용기 있게 그분께 다가섰고,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유명한 랍비의 제자들은 오직 남자뿐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여성 제자들도 두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이리 파격적인 행동, 결정을, 어찌 보면 진보적인, 그것도 급진적인 행동을 하셨을까? 그것은 각 사람을 그저 “한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사회적 통념이라는 편견을 떨쳐내고, 어떤 한 사람에게 주어진 상황과 조건보다는 그 사람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과 눈을 지녔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요즈음 참으로 많은 조건을 따지면서 사람을 만난다. 내 편, 네 편을 가르고, 사람을 구별하고 차별하며, 함께 사는 세상보다 끼리끼리의 동류 집단을 구성하려고 애쓴다. 이런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는 참으로 멀리 있다고 여겨진다. 온갖 구별과 차별이 난무하는 사회 풍토를 거스르기보다 거기에 편승하고, 자신만이 지닌 기준과 조건을 덧붙여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기를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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