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4일 금 [녹]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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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24-10-04 조회수161 |
복음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13-16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3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14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15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16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미사강론(2024.10.04.금 / [녹]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 고을은 도대체 무슨 일로 “불행하여라!”라는 예수님의 ‘불행 선언’을 듣게 되었을까? 성경 부록에 있는 ‘신약 시대의 팔레스티나’ 지도를 살펴보면,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은 갈릴래아 호수 북쪽에 삼각형 모양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 세 고을은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셨던 갈릴래아 호수 주변의 고을이었다.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처음 시작하셨던 곳이고(마태 4, 13 ; 마르 1, 21 ; 루카 4, 31), 벳사이다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마르 8, 22), 제자들과 함께 자주 들르셨던 동네였다(마르 6, 45 ; 루카 9, 10). 또 코라진은 이 문장에서만 등장할 뿐, 그곳에서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 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 복음과 같은 내용을 전해주는 마태오 복음에서는 이곳들을 “예수님께서 …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마태 11, 20)이라고 알려준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가장 많이 활동하셨고 가장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던 고을이었지만, 그곳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과 말씀을 보고 들었지만 깨닫지 못하였다. 구약 시대부터 수많은 임금과 예언자가 보고 싶어 하고 또 듣고 싶어 했던 것들을 직접 보고 듣고 있음에도 그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고 바뀌지 않았다. 결국 그곳 주민들은 교만하고 완고하여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님을 배척했기에 불행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를 배척하는 것이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하여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하느님을 배척하는 일이 된다. 그러니 우리의 하루하루가 회개의 여정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뜻에 승복해야 한다. 그렇게 하느님은 회개하는 작은 사람, 겸손한 인간을 총애하신다는 진리는 오늘 기념하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통해서 확연히 드러났다. 그의 한없는 겸손은 여러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신에 대한 ‘호칭’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을 ‘본인’이라고 하지 않았다. ‘나’라고도 하지 않았고, ‘아랫사람’, ‘작고 가난한 사람’, ‘천한 사람’, ‘모든 사람의 종’, ‘다른 형제들의 발아래 있는 사람’, ‘죄인 중의 죄인’, ‘주 하느님의 부당한 종’등으로 자신을 칭했다. 그의 겸손은 예수님의 겸손을 판박이처럼 빼닮았다. 그는 지속적인 겸손을 유지하려고 집도, 수도원도, 아무런 재산도 지니지 않았다.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음에도 겸손의 덕을 유지하려고 사제서품을 받지 않았다. 수도회 총장이 되었지만 갓 입회한 지원자에게도 순명하고자 애를 썼다. 프란치스코는 ‘나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라는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정신이나 이상, 영성으로만 추종한 것이 아니라, 100% 있는 그대로, 실제로, 구체적으로, 온몸으로 실천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회심 이후 한평생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떠돌이 생활을 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기쁘게 했고, 완벽한 가난의 실천을 가로막는 무수한 장벽들과의 피나는 투쟁이 그의 일생이었다. 그는 길을 가다가도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서슴없이 내어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이 외투를 본래의 주인인 저 가난한 사람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이 외투는 우리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만날 때까지만 우리가 잠시 빌린 것입니다. 나는 결코 도둑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필요한 사람에게 우리 것을 나누지 않는다면 우리는 도둑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점을 본다면,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에 내려진 ‘불행 선언’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미사 중에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성체의 기적을 보여 주고 계시는데, 지금 우리는 그것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바른 눈과 귀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의 눈과 귀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불행하여라!”가 아니라 “행복하여라!”라는 말씀을 들려주실 수 있도록 우리의 눈과 귀가 오롯이 그분을 향하였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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