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8일 월 [녹]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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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24-11-18 조회수157 |
복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미사강론 (2024.11.18.월 / [녹]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오늘 복음은 예리고의 눈먼 거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길가에 앉아”구걸하고 있던 중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라는 말을 듣고 자비를 부르짖었고, 다른 이들의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쳤다. 그는 예수님이 메시아일 것이라는 생각에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의 유다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는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11, 1)을 믿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오자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하고 물으신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지 않으신다. 오히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라고 물으셨다. 곧 당신께 대한 믿음을 묻는다. 여기서 우리는 청원 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곧 첫째는 믿음으로 청해야 하고, 둘째는 자신이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시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진정 청해야 할 바를 청해야 한다. 그런 탓에 프란치스코 성인은 ‘진정 원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아는 이는 이미 성인이다.’라고 말하였다. 눈먼 거지는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보아야, ‘다시 본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서 사용되는 “보다’ (ἀναβλέψω)라는 단어는 ‘위를 쳐다보다’, ‘새로운 것을 보다’, ‘시력을 회복하다’라는 뜻이다. 그러기에 신앙인이 눈을 뜨기 위해서는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쳐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그분의 사랑을 알게 될 때, 비로소 눈을 뜨게 된다. 결국, 그분의 ‘사랑을 보는 눈’이 다시 보는 눈이요, 새로운 눈이요, 영적인 눈이고, 영혼의 눈을 뜨는 일이다. 사실, 보지 못하는 것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있는 것은 보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결국, 보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어둠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보려고 해야 한다. 우리가 태어나면서 물질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이제는 ‘믿음’을 통해서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떠야 한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는 일이요, 지금 우리의 길을 동행하고 계시는 그분을 보는 일이다. 이처럼, “다시 볼 수 있게 된다.”라는 것은 빛의 세계로 나아감을 말해준다. 이제 그는 “길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동행하시는 주님을 “따라” 나서게 된다. 육적인 축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축복을 입어 온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눈먼 소경이 눈을 뜬 후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것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내 삶에서 가장 잘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인생 역전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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