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5일 수 [백] 주님 성탄 대축일 - 낮 미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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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24-12-25 조회수42 |
복음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18 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16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18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2024. 12. 25 : 다해 ; 답십리 본당)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한처음부터 계셨던 성자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일이 바로 오늘 성탄이다. 그런 탓에 오늘 들은 복음은 우리가 기념해야 하는 분이 누구인지 알려준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라고 알려준다. 또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라고 들려준다. 이처럼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육화의 신비는 예수님이 하느님이심을 알려준다. 즉 사람이신 예수님 안에는 신성(神性)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요한 복음사가가 이처럼 육화(incarnatio)의 신비를 자기 복음서 첫 장부터 강조하는 것은 당시 그리스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건 신성모독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실제로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람인 것처럼’ 보이고 행동하셨을 뿐으로 인간의 외적인 모습만을 취하셨다고 주장(假現說, docetism)하였다. 그래서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라고 말하는 것인데, 이때 “사람”으로 번역된 그리스어(σάρξ)는 기본적으로 ‘살’을 뜻하지만, ‘몸, 육신, 혈육을 가진 인간, 인간성’ 등 문맥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쓰인다. 이 그리스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בָּשָׂר)의 의미는 ‘살’, 즉 짐승의 근육 조직을 가리키지만, 나중에는 그 의미가 확대되어 사람의 몸이라든지 혈연관계, 생명 그 자체 등을 ‘창조된 생명’(Created life)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 두 개의 단어들 속에 내포된 의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혈육을 가진 인간이 되셨음과 그분에게도 우리와 같은 육체적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우리 인간과 구별되는 분명한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그분에게는 죄가 없고,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점이고(히브 4, 15), 둘째는 그분은 모든 일에 있어서 완전한 모범을 보이셨다는 점이다(요한 13, 15).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님만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며, 그분을 통해 변화됨으로써 온전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사셨다.”에서 ‘사셨다’(ἐσκήνωσεν)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천막을 세우다’ 혹은 ‘천막에 살다’를 뜻하는 단어(σκηνος)의 부정 과거형이다. 결국 문법적으로 따질 때 말씀이 우리 가운데 사신 것은 일회적이며 일시적이라고 알려준다 또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에서 ‘우리는 ~보았다’로 번역된 단어(ἐθεασάμεθα)는 언제나 실제 눈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 단어는 영이나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경우에는 사용되지 않는다. 결국 말씀이 현실적으로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으므로, 육안으로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은 단순히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현재진행형 사건이다. 왜냐하면 성탄은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해 열려 있다는 확실한 증거이며, 이 사랑은 단순히 감정적 차원을 넘어서, 우리의 삶과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이다. 바로 이 사랑 때문에 예수님은 인간이 되셨다. 그래서 이레네오 성인은 하느님의 강생은 “인간의 구원과 신화(Deificatio)를 위해서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말은 우리가 하느님처럼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다고 한다. 이건 정말 엄청나고 놀라운 이야기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강생의 신비를 통해 우리를 하느님으로 다시 태어나고, 우리의 삶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으로 변화시킨다. 이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실현되는 작은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도 구체화 된다. 그런 탓에 성탄은 단순한 대축일이 아니다. 성탄은 하늘과 땅이 만나고, 신성과 인성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기적이 펼쳐진 순간이다.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극진히 사랑한 나머지 당신 자신을 포기하셨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허리를 굽히셨다. 당신의 키를 극도로 낮추셨다. 보잘것없는 나를 위해 나와 하나되셨다. 그러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또 하나의 예수님이 되어서 세상을 밝게 비추고 사랑을 나누어 주기를, 또 받은 사랑에 걸맞은 삶을 살기를, 그리고 적어도 오늘만은 사랑을 나누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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