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31일 금 [백]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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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25-01-31 조회수72 |
복음 <씨를 뿌리고 자는 사이에 씨는 자라는데, 그 사람은 모른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26-34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6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27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32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34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2025. 1. 31 ; 답십리 본당) 요한 보스코(Joannes Bosco, 1815-1888)는 1815년 8월 16일, 이탈리아 북부 토리노 교구의 작은 마을 베키(Becchi)에서 농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급성 폐렴으로 그가 두 살 때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 마르가리타는 남편이 유언한 “자녀들을 부탁하오. 특히 어린 요한을 …”이라는 말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9세 때 그는 처음으로 예수님의 환시를 보았고, 또 성모님이 나타나셔서 가난한 소년들을 도와주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알려주는 말씀을 들었다. 이 체험을 한 후 그는 사제가 되려고 결심하였고, 이후 꿈을 통해 계시를 자주 받았다. 하지만 가난한 과부의 아들이었던 탓에 정규 학교에 갈 수 없어서 농한기를 이용해 인근 초등학교에서 읽기와 쓰기를 배웠다. 그는 12~14세까지 숙부의 집에서 일을 도우며 지냈다. 숙부는 요한의 뜻을 알고 칼로소(Giovanni Calosso)라는 신부에게 위탁, 공부시켰다. 그러나 칼로소 신부는 얼마 후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칼로소 신부는 그에게 한 개의 손금고[手金庫]와 열쇠를 남겼는데, 요한은 “저에겐 현세의 보배는 필요 없습니다. 천국만을 잃지 않으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라면서 끝내 받지 않았다 1830년 15살 때 읍내의 한 초등학교에서 단기 과정을 이수하였다. 이후 키에리(Chieri) 시의 인문 학교에 진학하여 5년 과정을 마치고 1835년 신학교에 입학해 1841년 4월 5일 토리노 교구 소속으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신부가 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소년원에 있는 청소년들을 찾아보는 것이다. 이후 그는 은인이자 영적 지도자였던 카파소(Giuseppe Cafasso) 신부의 도움으로 토리노에 있는 사제 연수원에서 신학 연구와 현대 사목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당시 이탈리아는 산업화가 진행되고 있었던 탓에 시골에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드는 청소년들로 많은 혼란이 발생하였고, 산업화는 인구의 도시 집중, 빈민촌의 형성, 비참한 노동 조건 등 부작용을 드러내었다. 그는 토리노에 머무는 동안 토리노의 뒷골목을 방황하는 소년들, 전쟁고아들, 감옥에서 만난 12~13세의 청소년들, 공장에서 비인간화되어 가는 소년 노동자들의 실태를 알고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버림받은 청소년들을 돌보아주고, 곁에 있어 주고 정직한 주인 밑에서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면, 훌륭한 시민과 착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체험하였다. 백여 명이 넘는 소년들과 함께 돈도 거처도 없이 광장, 목초지 등을 돌며 거의 1년 동안 이동하다가 1846년 4월 토리노 시의 발도코(Valdocco)에 정착하였다. 그가 회고록에서 1년 동안 이동한 목적을 “가장 많은 위험에 처한 소년들과 출감 소년들을 모으기 위해서였다.”라고 술회하였다. 이후 그는 카파소 신부와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발도코에 기숙사를 세웠으며 제본소, 인쇄소 등의 기술학교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토리노 사람들은 그 아이들을 “요한 보스코의 왈패 자식들”이라고 무시하였다. 그의 청소년 교육은 점차 확대되었고, 교육을 위해서 많은 저술과 출판사업을 통해 자신의 교육 이상을 펴나갔다. 그러나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일곱 번이나 살해될 뻔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어디선가 사나운 개가 나타나 악인에게 달려드는 등 기이한 일이 일어나 그 어려움을 면할 수 있었다. 그는 사업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교황 비오 9세의 권고에 따라 1859년에 18명의 제자에게 수도서약을 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해서 살레시오 수도회는 1869년 교황청으로부터 수도회 인가를 받고, 1870년에는 소녀들의 교육을 위해 살레시오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청소년들 특히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학교, 기숙사, 기술학교, 주일학교, 야간 학교 등 다양한 교육 기회를 제공한 보스코 신부는 19세기의 가장 훌륭한 교육자였다. 청소년 교육이라는 새로운 영성을 교회 안에 심은 대영성가(大靈性家)였다. “나는 청소년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며, 공부하고, 나의 생의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라는 확신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청소년 특히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다 내어주고 1888년 1월 31일 선종하였다. 요한 보스코는 청소년 교육에서 영혼과 육신이 결합된 인간성 전체를 교육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사랑에 대한 믿음이 우리가 하는 모든 것, 즉 일, 공부, 놀이 등 모든 것에 스며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일주일에 한 번 주일 미사에 참여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느님과 예수님을 찾고 발견하는 것이었다. 또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인도하도록 온전히 맡기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재능과 능력을 살리는 직업 훈련과 긍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그는 장사하는 기술에 관해서도 학생들을 훈련시켰다.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학생들이 진정 우리의 자녀라면 그들의 잘못을 고쳐 줄 때, 우리는 온갖 분노를 제거해 버리거나 분노를 완전히 제어한 것으로 보일 정도로 가라앉혀야 합니다. 분노로 마음의 평화를 잃거나 멸시의 눈초리를 보여주거나, 또는 마음 상하는 말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고, … 특별히 중대한 문제들이 있는 경우에는 절제 없이 말을 뇌까리는 것보다는 겸손과 항구심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절제 없이 말을 뇌까릴 때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 마음을 상하게 만들고 잘못을 저지른 이들에겐 유익한 것을 하나도 주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떤지 돌아보았으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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