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21일 금 [자] 사순 제2주간 금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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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25-03-21 조회수39 |
복음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33-43.45-46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45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비유들을 듣고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차리고, 46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사순 제2주간 금요일 (2025. 3. 21 ; 답십리 본당) 의형제를 맺은 도둑 세 명이 있었는데, 서로 협력하여 부잣집을 털어 큰 재물을 얻었다. 도둑 한 명이 자신들의 성공을 자축하고자 술을 사러 마을로 내려갔다. 그러자 남은 두 명은 좋은 기회라고 여기고 “우리 합심하여 저놈이 올라오면 즉시 죽여 버리자. 그러면 우리 몫이 더 커지지 않겠느냐?”라며 공모하고는 술을 사러 간 도둑이 올라오기만 기다렸다. 한편 술을 사러 간 도둑은 한참을 걸으며 ‘그래! 저 두 놈을 죽이면 그 많은 재물이 다 내 차지가 될 수 있을 터이니 저놈들을 죽여 버리자.’라고 생각하였다. 이윽고 마을로 내려간 도둑이 돌아오자 남은 두 명이 그를 죽여 버렸다. 뜻을 이룬 둘은 서로 축하하며 마음껏 술을 마셨다. 그런데 이 둘도 그만 죽고 말았다. 그들이 마신 술에는 독약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못된 도둑들처럼 오늘 복음에는 못된 소작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밭 임자가 모든 것을 다 해주고 포도밭을 맡겼기에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해야 할 텐데, 그러질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마치 그 포도밭이 자기 것인 양 소출 받으러 온 사람들을 죽이고, 심지어 주인의 아들마저 죽여 버리는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였다. 이는 포도밭을 차지하려는 욕심과 밭 임자에 대한 질투가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그렇다면 질투란 과연 무엇일까? 질투는 자신이 갖고자 원하는 것을 이미 충분히 받고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바라는 양에 부족하다며 스스로에게 주어진 몫에 만족하지 못하고남이 지닌 것이나, 남에게 주어지는 몫까지 탐을 내어 자기 것으로 하려는 욕심이다. 오늘 독서인 창세기의 요셉의 형제들처럼, 질투는 마음만으로 끝나지 않고 결국에는 상대방에게 상처와 해를 끼치고, 더 나아가 상대방을 죽음에까지 몰아넣을 수 있다. 이처럼 질투는 큰 죄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살면서 가깝게는 배우자나 가족들, 형제나 이웃들에게 자신 스스로 알면서, 혹은 모르면서 질투를 지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주어지거나 지닌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상대방의 것에 욕심을 부리고 자기 것으로 만들려 한다. 이는 비단 물질적인 것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상대방이 지닌 자신과는 다른 개성이나, 재능, 생각 등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을 상대방과 같게 하려고 애쓰거나, 반대로 자신의 것에 따르게 하려는 강제적인 말과 행위, 그러려고 애쓰는 그 마음 또한 질투에 휩싸인 것이다. 만일 우리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과 스스로의 가치에 만족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하고자 욕심을 부린다면, 결국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고 해를 끼치는 죄에 빠지게 된다. 그로 인한 결과는, 오늘 복음 말씀에서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처럼 자신이 지녔던 모든 것을 빼앗기고 파멸에 이르는 길을 자초하게 된다. 그런 탓에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질투의 대상이 되어서 그것을 견디느라 상처와 고통을 입은 사람들은 어떠할까? 우리들은 사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질투를 하지 않고 살기도 힘들거니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을 때 시기와 질타와 모함 등 우리를 해치려는 그 많은 죄악들을 견디고 극복하기는 참으로 어렵고 힘들다. 하지만 그 점 또한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하여, 충분히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남들로부터의 질투로 상처투성이가 되어 죽음에까지 이르는 고통에 서더라도, 바로 그 사람은, 파멸에 이른 자들로부터 거두어들인 몫까지 더하여 구원과 영광을 하느님으로부터 얻을 것이라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또 다른 생각이 든다. 그것은 소출을 받아오라고 파견한 종들이 가는 족족 죽어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상속자인 자기 아들을 사지(死地)로 몰아넣는 포도원 주인인 아버지의 어리석음이다. 소작인의 욕심은 바로 우리 인간의 끝도 없는 욕심이고 질투이다. 반면 지주의 어리석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내려지는 하느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의 어리석음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그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든가 ‘기준 없는 마구 퍼주기’식으로 알아들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은 “그렇지만, 그래서”라는 말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하시는 분으로 우리의 회개를 진정으로 원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당신의 아들까지 보내며 제발 그러지 말라고 빌고 계시는 분이다. 사람에게 빌고 계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제 때에 도조를 잘 내고 있는가? 아니 무엇을 바치고 있는가? 하느님의 은혜로 거둔 것까지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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